2016. 1. 18. 13:20



06/86

 

 

 

 

 

너는 자꾸만 반짝반짝 빛나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너는 키도 나보다 손 한뼘 정도는 크다. 너는 항상 밖에서 열심히 훈련을 하고, 나는 한 번도 밖에 나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일테다. 내가 여기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온갖 삑삑거리는 소리와 바늘을 맞고 있을 때 너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는 경사로를 오른다.

 

당당한 네가 부럽고, 너만 나타나면 휙휙 돌아가는 내 고개가 밉다. 그런데 밉다가도 너를 보고 있으면 또 좋다. 네 걸음이 어딜 향하는지 궁금하고, 누구와 말을 하는지 꼭 보고야 만다. 그렇게 너를 쫓아 시선을 옮기다 네가 커다란 철문 너머로 사라지면 어딘가 모르게 허탈해서 아무도 모르게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본다. 쇄골과 가슴 사이,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그곳이 그때마다 유난히 시리고 공허하다.

 

너는 그렇게 온종일 밖에 있다가 해가 지면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런 네 피부는 까무잡잡하다. 아니, 그렇다고 보기싫게 탄 것은 아니고 딱 예쁘게 그을렸다. 나는 네 피부가 좋다, 정말로. 예쁘다는 것도, 정말로.

 

다 진심이다. 누가 의심한 적도 없지만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 진짜, 정말, 진짜진짜 진심이다.

 

누구에게 얘기한 적도 없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깜빡거리는 형광등 아래에 서서 미적지근한 물로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뒤 다시 확인하려 거울 앞에 서고, 거울을 바라보며 ‘오늘은 식당에서 뭐가 나올까' ,‘오늘은 피를 몇 번이나 뽑아갈까' ,‘ 선생님이 사탕 주면 좋겠다, 기왕이면 딸기맛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하다보면 어느새 네 생각으로 맺어진다. 끝은 항상 너다. ‘오늘 식당에서 너를 볼 수 있을까? 네가 나를 볼까?’, ‘오늘 피곤한데, 초췌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나?’, ‘사탕을 두 개 받았으면 좋겠다, 너랑 나눠먹을 수 있게.’

 

나 혼자 시작해서 나 혼자 끝낸다. 네 생각 하고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 네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을 볼 때마다 네가 떠오르진 않는다, 그런 바보는 나도 싫다. 그냥 네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너와 관련된 생각이 아닌데도 네 생각으로 이어진다. 참 이상하다.

 

내 머릿속에서만 바쁘게 일어나는 일이라 너는 이런 상황을 모른다.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너는 나를 모른다. 그렇다.

 

내가 너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다.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모른다.

 

어느날 갑자기 모르는 애가 나에게 와서 “맨날 네 생각을 하고 있어. 종종 네가 생각나고, 네가 뭐 하는지 궁금해" 라고 대뜸 말을 한다면 나는 뭐라고 생각할까, 아마 부담스러울 것이다.‘얜 누구지? 나는 얘를 모르는데 얘는 어떻게 나를 알지?’ 혹은 ‘ 나를 좋아해서 계속 나를 봐왔다고?”하고 겁도 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네가 나를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내가 진짜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말이다.

 

내가 팔이 없다거나, 뼈가 튀어나와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좀 이상하게 생겼다. 얼굴도 멀쩡하고 팔다리도 멀쩡하다. 눈도 두 개고, 입술도 하나, 코도 하나다.

 

대신 심장이 밖으로 나와있다.

 

그래, 바로 그 심장이다. 모든 사람들이 심장을 그리라고 하면 하트를 그린다. 은연중에 심장은 따뜻하고, 귀엽고, 둥글둥글한, 애정을 주어야 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전혀 아니다. 따뜻하긴 한데, 완전 징그럽다. 혈관과 동맥들이 불거진 그 기관은 전혀 예쁘지도 않다. 다행히도 보통 그것은 사람 몸 안에 있어서, 그들은 이 징그러운 것을 직접 보면서 살아갈 일이 없다. 나만 빼고.

 

나의 왼쪽 가슴에는 두 개의 동맥이 밖으로 길게 뻗어있다. 그리고 거기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아래에 동맥보단 작은 혈관 서너개가 밖으로 나와있고, 동맥에서 시계방향으로 5시 정도에는 얇고 굵은 혈관들이 제멋대로 얽혀있다. 그 모든 혈관이 향하는 곳은 바로 심장이다.

 

불편하다. 이렇게 밖에 둘 거면, 심장도 움직일 발이 있으면 좋겠는데 밖으로 나와있는 것 외엔 보통 심장과 똑같다. 내가 두 팔로 직접 안고 다녀야 움직일 수 있다. 매번 안고 다니려니 팔이 저려서, 어느날은 홧김에 바닥에 놓고 걸음을 옮겼는데,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날 이후엔 미워도 안고 다닌다.

 

이런 내가 가련한 모양이었는지 선생님들은 내 심장이 입을 옷을 만들어주었다. 너와 내가 입고 있는 그런 류의 옷은 아니다. 이 옷은 철갑으로 지어져 매우 단단하다. 심장과 나를 이어주고 있는 혈관에도 이 강철 옷을 입혔다. 이제 나는 반쯤 기계인, 그런 존재로 보인다. 심장의 거의 모든 면이 철갑으로 둘러싸였다. 단 한 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두꺼운 유리로 만든 면을 제외하면 이제 바닥에 두었다가 모서리에 걸려 엄청난 아픔과 함게 바닥을 구르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소리는 들린다.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

 

이게 왜 문제냐면, 네 앞에만 가면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때문이다. 쿵쾅, 쿵쾅, 쿵쾅.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빨라진다. 어찌보면 네 탓인 것 같다. 네가 날 그렇게 만든다. 매 순간 반짝반짝 빛나서 얌전히 있던 내 심장을 뛰게 만들고 나는 부끄러워져 숨게된다. 자꾸만, 자꾸만.

 

자꾸만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

 

 

 

 

어느날, 검사를 끝내고 잠깐의 낮잠을 즐긴 뒤 눈을 떴을 때, 나는 주위가 유난히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은편 침대를 보니 역시 비어있었다. 평소같으면 룸메이트인 코니발이 공중에서 큐브를 돌리며, 다른 손엔 식당에서 몰래 가져온 음식을 입에 넣으며 비스듬하게 누워있을 테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검사가 늦어지거나 내가 자는 사이에 검사를 하러 간 것일까, 눈가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몸을 세우자 가슴 앞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동맥을 감싸고 있는 철갑의 이음새가 움직이며 내는 소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눈높이의 선반에 놓여있던 심장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떨어지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다리와 허리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는 온기가 아쉬워져서 5분 정도를 더 앉아있었다. 겨우 온기의 유혹을 떨쳐내고 나서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살짝 서늘해서 선반에 내 심장과 같이 놓여있었던 망토를 집어들어 어깨에 걸쳤다.

 

음. 그래도 조금 서늘했다. 곧 따뜻해지겠지?

 

몸을 작게 떨며, 한 손에는 심장을 안아든 채로 나는 방을 가로질러 정수기 쪽으로 걸어갔다. 푸른색의 버튼을 누르자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곧 물이 3분의 2정도 채워진 종이컵이 내려왔다. 막 잠에서 깨어난 탓에 입안이 조금 말라있었다. 잔을 모두 비우고 나선 방 중앙에 있는 투입구로 컵을 던져넣었다. 쓸모없는 것은 소각장으로 가고 혹시라도 우리의 생체정보를 얻을 수 있다거나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수거되어 연구실로 가게될 것이다.

 

나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지만 곧바로 일어났다. 이불 안으로 두 다리를 집어넣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불은 잊자. 선반 옆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심장과 함께 안아들었다.

 

식당, 사무실. 어디로 갈까?

 

흠, 하고 짧게 소리를 흘리며 고민했다. 시간을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방송이 나오지 않는 이상 나 혼자서 시간을 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알 수 없으니 제럴드 선생님의 사무실에 가더라도 아무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방송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식당은 한가할지도 모른다. 설마 나가자마자 저녁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진 않겠지.

 

제럴드 선생님은 내일 검사할 때 또 보면 되니까. 나는 식당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자신있게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열린 틈 사이로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반쯤 부셔진 천장 사이로 주황색을 띄는 빛이 들어와 한쪽에 잔뜩 쓰러져 있는 의자와 책상을 비추고 있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천장에 간신히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푸른색의 조명 밑에는 패널이 완전히 깨진 자판기에서 쏟아져 나온 캔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내가 예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 거지? 왜 저렇게 다 부셔져 있는 거지? 자판기는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문을 열면 깨끗하게 닦여있는 책상과 의자들이 놓인 휴게실이 보여야 했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 대신 적정온도로 잘 맞춰진 히터가 주는 온기가 느껴져야 했다. 그리고 적어도 5명의 아이들이 휴게실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의 유지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열어젖힌 문 뒷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들의 뾰족한 구두소리보단 좀 더 투박한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곤 발을 굴러보았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보단 가벼운 소리가 났다. 혹시 밖으로 나갔던 아이일까? 그 생각을 하는 즉시 네가 생각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네 생각을 하며, 너이기를 바라며, 동시에 너일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조소하며 나는 앞으로 몸을 뻗어 문에 바짝 달라붙었다. 군데군데 부셔져 빛이 들어오는 복도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너였다.

 

멀리있어도 알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에 살짝 그을린 피부. 하루에 몇 번이나 너에게 시선을 두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먼저 너를 반긴 것은 내 심장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꽉 끌어안았다. 아직 너와 나 사이 거리는 멀었지만 네가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숨죽였고, 심장을 최대한 감싸안았다. 너다, 너. 어떡하지?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건물은 반쯤 부셔져있고,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네가 나타나고.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멍해선 뭘 해야할지, 어디에 서있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물드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기 위해 간단한 생각부터 시작하려 했지만 머릿속에서 수십번도 넘게 들은 네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는 바람에 나는 그만 생각을 놔버렸다. 네가 나를 불렀다, 세상에.

 

 

“너, 너....?”

 

 

나는 대답하는 대신 얼른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쿵, 쿵, 쿵.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나는 진땀을 흘리며 심장을 안아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네 발소리는 가까워졌고 나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만 싶었다. 좋은데, 네 얼굴도 보고 네 목소리도 듣고. 무엇보다 네가 나를 봐줘서 정말 좋은데, 가까이 오면 이 소리까지 다 들릴 것 같아서 너무 불안했다. 뭐라고 할까, 네가 이걸 보고 징그러워 하지 않을까? 당연하지. 심장이 밖에 나와있는데다 징그럽게 혈관들가지 늘어져 있으니.

 

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나는 고개를 젖혀 문에 기댔다.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있었는데, 문득 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으로 아까 보았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네가 나를 불렀을 때, 열 걸음도 남지 않았다. 내 쪽으로 오려던 게 아니었나? 그제서야 나는 심장을 느슨하게 고쳐 안았다. 괜히 어림짐작한 걸까. 여전히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속은 느낌이라 발밑에 부스러져 있던 돌맹이 같은 것을 걷어찼다. 조금 민망하기도 했고, 화가 났다. 혼자서 착각한 나한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그냥 가버린 네가 미운 건진 잘 몰랐지만 분한 마음이 들었다.

 

확실하게 확인하려 나는 다시 앞으로 몸을 뻗었다. 문을 잡고 고개를 빼려고 했을 때, 동시에 내 앞에서 뭔가가 앞으로 뻗어나왔다.

 

놀라서 심장을 떨어트릴뻔 했다. 짧게 숨을 들이쉬며 나는 심장을 꽉 끌어안았다. 바로 코앞에서 연한 초록빛 눈동자가 깜빡거리는 일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 다시 너였다.

 

너는 어색한듯 눈을 굴리다 씩 웃어보였고, 나는, 나는. 나는 입만 달싹거렸다.

 

 

“어...안녕?”

 

 

어느새 심장이 더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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